마해송 선생님의 '떡배단배'

독백_일기,잡담 2012. 3. 9. 11:06

지금 MBTI를 해보면 난 무척 외향적인 인간(ENTP)으로 나오는데, 어릴땐 누가 봐도 무척 내성적이라 친구도 없었고 그냥 공부만 했던 애였다.

그런 내가 딱했던지, '심심할땐 우리집에 놀러오라'고 했던 여선생님이 한분 계셨는데

국민학교때 하도 전학을 다녀서 졸업앨범에도 남아있지않고 그분 성함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쌍둥이 딸을 키우며 혼자 교사 일을 하던분이었던것 같다..

그 집에 놀러가면 맛있는 차도 내주시고 재미있는 책도 빌려주시곤 해서 자주 갔던 기억이 난다... 온 방 안에 책만 가득가득 있어서 하루종일 책만 보고, 정작 그 집 애들이랑은 말 한마디도 안했구나...-_-; 지금 생각해보니 몹쓸놈이었네; 아마 걔들도 엄마가 전근다니느라 친구가 없어서 그랬던것 같은데 음....


오래된 종이냄새 가득한 방 안에 빼곡히 꽂혀있던 문고판 책들 사이에

'떡배단배'라는 책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무심코 집어들었던 책인데, 그 시절 어린마음에 뭔가 큰 파장을 남겨줬던 모양이다.

이제와서 그게 떠오르는걸 보면...



********



이야기의 무대는 작은 섬마을, 외부와 단절되어있어 낙후되긴 했으나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는 어진 사람들의 세상.


그러던 어느날, 나루터에 엄청나게 큰 배가 나타난다.


오색빛깔 향기롭고 맛좋은 떡들을 가득 싣고 온 신 문명의 사람들은

섬 사람들이 듣도보도 못하던 신기한 기계들과 먹거리들을 내려놓고 갔다.


섬 사람들은 그 배를 '떡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 얼마 지나지않아 이번에는 그 못지않게 큰 배가 나타나,

더 신기하고 대단한 기계들과 '단것'들을 내려놓고 간다.


사람들은 이 배를 '단배'라고 불렀다.


이렇게 섬마을 세상을 뒤흔들어놓던 두 배 (세력)들은 

경쟁하듯 섬 사람들을 자기들 편으로 만드는 한편, 

자신들이 주고 간 신 문물에 대한 대가로

섬 사람들이 생산하는 수수깡, 짚풀 따위를 가져가기 시작한다.


떡배와 단배는 점점 더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 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커다란 배가 온통 유리로 되어있어 번쩍번쩍 빛나고 안이 다 투명하게 비치는 떡배,


말끔한 쇠로 만들어져, 버튼 하나만 띡 누르면 계단이 스르르 내려와 사람들을 태워서

2층이고 3층이고 자동으로 올려다주는 단배....


언젠가부터 떡배와 단배가 주고 가는 물건들이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섬마을 사람들,

이제 떡배와 단배는 섬마을 사람들이 가꾼 곡식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느새 섬 사람들은

떡배파와 단배파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싸움을 시작한다.........


뭐 대충 이정도가 제 기억을 더듬은 '떡배단배'의 줄거리인데,

중간중간의 대사라든지...


"우리 뒤에는 떡배가 있지 않소!"


........... 이런것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니 지금생각해보니 그 선생님; 애한테 무슨 책을 보여준거야;;;)



한미FTA비준 날치기 통과를 지켜보며, 뭔가 기억 한켠에 꾸물거리는게 있었는데

일이 바쁘고 정신없이 지낸 나날동안 잠자코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야 딱 그 실마리가 손에 잡히길래

쑥 잡아당겼더니 '떡배단배'라는 기억이 딸려나왔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미 절판되어 없는 책이지만...

찾다보니 아니나다를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이 있었다.

동화로 읽는 - 힘센 나라가 다른나라를 쥐어짜는방법

 http://blog.naver.com/cahdol/10121203543

(포스팅하신 내용에 책 본문 일부가 있어 하단에 첨부..)



어린이들에게 이런 책을 읽히는건, 그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금의 나로 성장하는데 있어 몇 개의 전환점이 있었다고 보는데,

떡배단배를 비롯한 마해송선생님의 동화들과

중딩때 교회 수련회에서 (어른들이 빨갱이라 부르던 형아들에게) 배운 '바위처럼' 노래와 율동,

홍경인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실제론 읽지도 않으면서 서재 장식용으로 '인물과사상'을 구독하던 

친구네아버지 덕분에 읽은 강준만씨의 '김대중죽이기' 등...




섬사람들이 떡집 패, 단집 패 두 패로 쫙 갈려서 큰 싸움이 벌어지려고 하였다. 섬사람들이 모여 왔다. 그러나 일을 하려고는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돌쇠! 이제는 우리들도 싸우러 나가야 하지 않겠소?”

“돌쇠는 어떻게 생각하오?”

여러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돌쇠의 말에 섬사람들은 자리에 앉았다. 십여 명이 되었다.

“떡배나 단배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구 어떻게 사는지 아는 사람이 있소?”

돌쇠는 이렇게 물었다.

“듣기는 들었는데 ……”

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돌쇠는 이어서 이야기하였다.

“우리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훌륭한 옷을 입고 훌륭한 유리신을 신고 푹신푹신한 자리에서 자고 훌륭한 것을 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지요. 모두가 틀을 생각해 내서 틀이 일을 해 주니까 사람은 할 일이 없어요. 단추 하나를 누르면 앉은 의자가 그대로 스르르 이층, 삼층으로 가는 것도 틀이 움직여 주니까 되는 일이지요. 배를 타고 나라로 가지고 가서 무엇이든 틀로 만들어 내니까 그렇겠지요.”

“으음!”

섬사람들은 돌쇠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옷도 입지 못하고 신도 신지 않고 날마다 물고기나 떡 조각을 먹고 살아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되지요.”

“그렇지!”

떡배 사람의 나라에는 단것이 부족해서 단것을 널리 찾으러 다니는 게지. 그 나라에서 나는 수수깡이나 짚풀만으로는 부족해서 그것을 널리 찾으러 다니는 거지. 이렇게 세상을 모르고 뒤떨어져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조그만 섬까지도 저 사람들은 찾아와서 처음에는 거저 주는 것같이, 고맙게 해 주는 것같이 하면서 쏙쏙 알맹이로 귀한 것은 모조리 훑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오?

“원, 저런!”

“그렇지, 우리 섬에는 인제는 수수깡이나 떡쌀(떡 찌는 데 쓰는 쌀 - 옮긴이) 농사도 돌쇠네 것이 있을 뿐이야. 그렇구나!”

“참말 인제 섬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때야말로 저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오. 온 섬을 수수깡밭을 만들어서 그것을 바치라면 ‘예예.’하고 그대로 해야겠고, 저  사람들의 말을 무엇이든지 듣고 심부름을 하고 (그들이 - 옮긴이) 주는 것을 얻어먹게 되는 것이 아니오? 개가 되는 게지!”

“개! 우리들을 개로 만들려고!”

“그렇지만 세상을 모르고 세상에 뒤떨어져서 틀(여기서는 ‘기계’또는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 옮긴이)을 하나도 모르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우리들뿐이 아니오.”

“음, 또 있어?”

“있구말구. 세상은 넓으니까 넓은 세상에는 어디든지 그런 사람들이 많지!”

“우리 편도 있구먼!”

“그렇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끼리 서로 도와서 하루바삐 저 사람들에게 지지 않도록, 또 빼앗기지 않도록 힘써야 하지 않아요?”

“그렇지! 그렇지!”

“그렇다면 단배의 것을 떡배가 가지고 갔다 해서 섬사람들이 떡집 패, 단집 패로 쫙 갈려서 싸우면 죽는 사람, 병X 되는 사람은 누구이겠어요?”

“음, 그렇구나! 떡배, 단배는 바다에 떠서 구경만 하고, 싸워서 죽고 병X 되는 X은 우리들 섬사람뿐이지!”

“고약한데.”

“음, 이렇게 싸우게 하는 것도 미리 생각한 일인지도 모르지!”

섬사람들은 수성수성하고(몹시 수군거리고 씨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내고 - 옮긴이) 흥흥거리고(코를 잇따라 세게 풀거나 콧김을 불고. 여기서는 ‘흥분해서 큰 소리로 숨을 쉬고’라는 뜻임 - 옮긴이) 욕도 하고 떠들었다.

― 마해송 선생의 동화인 <떡배 단배>에서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