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2006 취재일지, 안양 동안구에서.




"이기자, 정기자 두 사람 안양으로 출동해."

"예에? 이제 막 들어왔는데요? 아직 기사 송고도 해야 하고.."

"취재한거 대충 정리해서 안기자한테 넘기고, 정기자 차 없지? 이기자 차로 둘이 갔다와."

"아..... 어딘데요?"

"안양."


이제 막 복귀해서 한숨 돌리는데 또 나가란다. 한시간 뒤가 마감인데... 아무리 수습기자라지만 이건 굴려도 너무 굴리는거 아닌가 싶다. 그래, 선배님들이 이만저만 하늘같아야지! 정기자는 티 안나게 궁시렁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누나 오늘 약속 있다며. 지금 나가면 또 새벽 퇴근인데, 어쩌냐?"


누나라고 불린 짧은 머리의 여성은 입술을 앙다물며 짧게 신음했다. 흠-


"그렇지 뭐."

"그래도 안양이라 다행이네. 어제는 고양, 그제는 이천, 지난주엔 화성 갔었지?"

"가까워서 고맙네 안양.... 그보다, 선배들 앞에선 이기자라 부르는거 잊지 마."


서둘러 운전석에 오른 이기자가 클러치를 밟고 시동을 거는 사이 정기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홍 선배.


"예, 지금 부장님 지시 받고 안양으로 출발합니다. 동안구 관악타운 아파트단지 정전... 맞습니까? 근데 이거 복구된 것 아니었나요?"

"응 그거, YTN 애들이 삽질했어. 정전 12시간만에 복구됐다고만 썼지, 단수는 안 썼거든. 아직도 물 안나와서 주민들 난리랜다."


전력 소비 급증…밤새 정전 잇따라

YTN|기사입력 2006-08-09 12:03
[지순한 기자]

연일 계속되고 있는 무더위로 전력 소비량이 크게 늘면서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전력 공급이 끊겨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어젯밤 11시 20분 쯤 안양시 부흥동에 있는 모 아파트 단지의 변압기가 불에 타면서 전력공급이 끊겼습니다.

사고가 나자 한전측이 복구에 나서 12시간 만에 전력 공급은 재개됐지만 찜통 더위 속에서 천 8백 세대가 잠을 설치는 등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본사가 있는 수원을 출발해서 안양에 이르기까지 20여 분... 조수석의 정기자는 당연하다는듯 코를 골기 시작했다. 수습기자 하루 평균 수면 1시간 반, 새벽에 출근해서 일과 끝나면 또 새벽까지 경찰서 지구대 순회하며 사건사고 단신 수집, 입사 후 주말따윈 없었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운전하는 사람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인데, 항상 '차 없다'는 핑계로 남의 차 얻어타는 놈이 얄밉게 코까지 골며 잠을 자다니.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이기자는 안양으로 차를 몰았다.


"야, 다 왔어. 일어나."


디지털카메라와 취재수첩을 챙기고 차에서 내리자, 급수차로부터 식수를 받기 위해 물통이며 주전자를 들고 줄을 선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전으로 밤새 더위에 시달렸는지, 반바지나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끌며 부채질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전 아파트 단지 급수

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8-09 11:54 |최종수정2006-08-09 11:54


9일 오전 12시간째 정전이 되고 있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악타운에서 주민들이 긴급지원된 물을 받고 있다. /한미희/지방/기사참조/2006.8.9(안양=연합뉴스) eoyyie@yna.co.kr (한미희)



"아이구야... 이거 원, 참사가 따로 없었구만."

"일단 관리사무소부터 찾자."


내가 주차하고 오는동안 이새끼는 또 예쁜여자나 찾고 있었겠지,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발을 옮기는 이기자였다.


"복구작업이 끝났댔잖아? 근데 왜 물이 안 나오고 지랄이야?"

"보도가 잘못됐거나, 모종의 입막음이 있었을지도."

"그런가... 저사람들 보니까 괜히 목마르네. 마실 것 좀 사올까?"


이기자는 됐다는 말 대신 흘깃 째려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꼼꼼한 성격 만큼이나 단정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반면 아직도 잠이 덜 깬 정기자는 마치 이 아파트의 주민이 된 듯,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한 손에는 수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볼펜 뒤꼭지로 머리를 득득 긁으며 이 동네엔 예쁜 여자 없나 두리번거리던 중, 불만 가득한 표정의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헤이 소년, 아저씨랑 얘기 좀 할까?"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수상한 아저씨의 말에 흠칫 놀란 학생은 주변을 살폈다.


"자네 말이야 자네. 어딜 돌아보나. 학생, 여기 살지?"

"아... 네."

"어젯밤부터 정전이라며? 물도 어제부터 안나오는거야? 아참, 나는 ㅇㅇ신문의 정아무개 기자라고 하는데, 명함 하나 가질래?"


생긴것보다 덜 위험해보였는지, 짧게 한숨을 내쉰 학생이 입을 열었다.


"네 어젯밤부터요. 물 안나와서 세수도 못하고 학교 갔다가 이제 왔는데 아직도 정전이네. 학교 갔더니 애들이 니네집 TV에 나왔다고 난리에요."

"어이구, 그럼 부모님은 출근하시고? 집엔 아무도 없어?"

"어머니랑 할머니. 근데 집이 15층이라 올라가기 귀찮은데 그냥 겜방이나... 아 짜증나 뉴스에선 다 복구됐다더니. 그냥 애들이랑 놀다 올걸."


그래 짜증날만도 하지. 단지 밖으로 발길을 돌리는 학생에게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니 잠깐, 15층? 정기자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기사에 여기가 1800여 가구라고 했었지? '계단으로 오르내리기 힘든 고층'에 노인이나 어린이가 있는 집도 있을 터, 12시간째 정전에 단수 상황이라면 이깟 급수차로 될 일이 아니잖아. 지금 전기도 물도 끊긴 집에 갇힌 노인들이 한둘이 아닐텐데, 이러다 대형 사고 터지는거 아냐? 
정기자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야, 너 지금 어디있어?"

"주민들 만나서 인터뷰 따고 있는데."

"됐으니까 빨리 관리사무소로 와. 분위기 심각하다."



관리사무소... 어느샌가 어둑어둑해졌다 싶더니 관리사무소 건물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주고받는 말들을 대충 들어보니 항의하러 온 사람들이다. 사무소 안에 들어서니 이미 주민들 여남은 명이 삿대질을 해가며 욕을 하고 있다. 


"소장 어디있어? 소장 나와!"

"이 한여름에! 정전에 단수까지... 이러려고 피같은 관리비 내는 줄 알아?"


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짐짓 모른척하며 분주하게 일을 하는 시늉이고, 청나라 사람처럼 앞머리만 벗어진,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고있는 아저씨가 소장인 모양이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최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 험악한 말이 오가긴 하는데 별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이대로 구경만 한다고 뭔가 해결될 것 같진 않고.... 사태를 지켜보는 중에, 이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선배님. 예.... 예. 알겠습니다. 1106동이요? ..... 예."


전화를 끊자마자 이기자는 서둘러 사무소를 나섰다.


"뭐래?"

"홍선배인데, 부장님 친구분이 이 아파트 산다고, 만나서 정보 얻으래."

"어, 나도 가야되나?"

"싫음 여기 있든가."

"그래, 뭐..."


한사람 취재하는데 둘 다 갈 필요는 없지. 난 여기나 좀 더 지켜볼까... 
정기자는 방문객용 긴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5분, 10분이 지나고... 주민들과 소장의 패턴을 대충 파악했다. 

노기등등해서 사무소를 찾은 주민들은 2~3분간 폭언을 퍼붓고, 소장은 짐짓 쩔쩔매는 표정을 지으며 예의 무책임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흥분이 가라앉은 주민은 그제야 노인에게 험한 말을 퍼부은 것이 머쓱해져서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고 서둘러 정상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또 다음 주민이 등장하고... 무한반복이다. 
이 인간들, 뭔가를 해결할 마음이 있긴 한거야? 

밖에 나와보니 어느샌가 모여든 주민들이 관리사무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데, 족히 백명은 돼 보였다. 
여기서 웅성웅성 볼멘 소리나 주고받다가 한명씩 들어가서 기껏 입에발린 답변이나 듣고 나오는 게 고작이라니,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왜 진도를 못 나가냐. 
정기자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병법이 있었지? 
'불 난 집에 기름 붓기'라고.


"끌어내라!"


절묘했다. 튀지 않게,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에 적절하게 섞여 들어갔다. 본인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투덜대는 소리나 내뱉던 사람들 입에서 '이새끼들 다 잡아 죽이자'는 과격한 소리까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화악-'하고 불이 붙어 올랐다. 몇몇은 고함을 지르고 또 몇은 숫제 소장의 멱살이라도 잡아 끌고 나올 기세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정기자는 이 소동을 틈타 꽁무니를 빼기로 했다. 어릴 적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줄달음질 치던 모양으로.


'1106호라 했던가...'


서둘러 발을 옮기며 조금 전 이기자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일단 그쪽으로 합류할까... 모퉁이를 돌자 1106호 입구의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기자와, 그 부장 친구라는 사람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어, 넌 안온다더니. 박선생님, 제 동료 기자에요."

"아...."


내가 다가가자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던 아저씨는 그제야 경계를 누그러뜨렸고, 이기자는 끊긴 대화를 서둘러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번 정전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니까. 처음이 뭐야, 이번이 세번째야."

"세번이나.... 원인이 뭔데요?"

"고열로 인한 누전이지."


설명인즉, 정전의 원인은 아파트 기계실에 있었다. 단지 내 전 세대에 공급되는 전기는 그 기계실을 거치는데, 전력 사용량이 많은 여름에는 기계실이 과열로 찜통이 되게 마련이고, 그 열로 전선이 녹아서 서로 엉겨붙어 누전이 된다는 얘기다. 
처음은 2001년에 누전으로 단지 전체 정전과 단수 사태가 발생했고, 기계실 전선 교체작업을 한지 3년 뒤인 2004년에 또 한번, 다시 2년이 지난 지금 또 같은 사고가 생긴 것이다.


정전 아파트 단지 복구작업

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8-09 11:54 |최종수정2006-08-09 11:54


9일 오전 12시간째 정전이 되고 있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악타운 기계실에서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과열로 탄 전선을 교체하고 있다. /한미희/지방/기사참조/2006.8.9(안양=연합뉴스) eoyyie@yna.co.kr (한미희) 




"그때 그걸 교체 안했어요?"

"그때도 주민들 특별회비 다 걷어서 보수공사한다고 했는데, 전선을 싹 다 교체하려면 돈 많이 들잖아. 그러니까 녹아 엉겨붙은 부분만 잘라서 때우고 그냥 쓰는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뻔한 얘기다. 예산은 기계실 내 전선 전체 교체로 잡고, 집행은 일부만 하면 제법 떨어지니까... 관리사무소 측에서 적어도 기천만원은 착복했을 것. 


"그리고 말야. 그때 그 소장이, 아직도 소장이야."

"아....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하지?"

"이상하잖아요. 일단 선생님께서 이 내용을 알고 계시다는건, 그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이런 내막에 대한 소문이 일단 주민들 사이에 존재한다는건데, 어떻게 그 소장이 아직도 관리사무소에 있을 수 있죠?"


의아해하는 정기자의 질문에 아저씨는 빙글빙글 웃기만 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 사회부 기자지? 정치부 기자라면 내가 무슨 말 하는건지 알텐데."

"아..."

"생각해보게. 관리소장 선임권은 누구에게 있지?"

"글쎄요. 아파트에 안 살아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이기자가 입을 열었다.


"동대표 회의... 아닌가?"

"맞아. 각 동의 주민들이 선출한 동대표들이 모여서, 전체 아파트 단지 운영과 관리 전반에 대한 결정을 하지. 그런데, 두 번이나 횡령을 저지른 관리소장은 왜 아직도잘리지 않았을까?"

"아....."

"먹었군요."


이번에는 정기자가, 내뱉었다.


"그렇지. 그런걸세."


한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는 우리를 남겨두고, 이만 하면 충분히 정보가 되었을거란 말을 남기고 아저씨는 계단을 올랐다. 황망해진 우리는 천천히 다시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는! 이, 사태를! 더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결단코! 관리소장은 이 사태를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두서없이 중언부언하는 웅변조의 말소리가 한 박자씩 쉴 때 마다, 와- 하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벌써! 이틀째입니다! 정전과 단수가 된지 이십! 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관리! 소장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저는 이 아파트의 동대표입니다! 동! 대표로서! 책임을! 묻겠습니다!"


관리사무소 앞에 모여든 주민들은 이미 2~3백명은 돼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단지 내에 축제나 무슨 장터라도 열린 줄 알았을 것이다. 
비루한 두 명의 직원과 함께 주민들에게 에워싸인 관리소장이 쩔쩔매고 서 있고, 
분에 못 이긴 주민들이 하나씩 목청을 높여 그를 규탄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준 이웃에게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를 보낸다. 
또 다른 사람이 이어 목청을 높이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이따금씩은 욕설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청나라 머리를 한 소장은 여전히 땀을 닦으며 곤란해한다.


"이 사람들 아직도 이러고 있나."

"뭐야, 인민재판 하나?"


말 그대로 인민재판인지 마녀 화형식인지 모를 의식은 밤이 깊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공공의 적을 눈앞에 두고 의협심과 끈끈한 동지애로 단결한 이웃들은 서로의 규탄의 목소리를 응원하고 치하하며 만족해하지만, 그 공공의 적은 아무리 욕을 먹어도 죽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오래오래 살지 않을까?


"어머 세상에 이게 뭐니 쪽팔리게, 만안구 서민아파트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러게 남사스러워서 정말. 어제 기자들도 왔다간 모양인데, 이러다 집값 떨어지는거 아냐?"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던 정기자의 귀에 들어온 주민들의 말이, 아까 그 1106동 아저씨가 들려준 이야기보다도 충격적이다. 
아... 그래, 이런 주민들이구나. 이 주민들 수준에 딱 어울리는 등신같은 동대표회의, 그 품격에 딱 걸맞는 관리사무소... 왠지 허탈해졌다. 보고있기 답답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짓도, 뭔가 캐보겠다고 취재하고 들쑤시고 다녔던 일도..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나 싶어졌다.
이기자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철수하래. 어차피 부장님이 친구분 통해서 취재 끝냈으니 오늘은 여기서 퇴근하랜다."

"또야? 아, 어차피 직접 쓰실거 우린 왜 온거야?"


투덜대지만, 내용만 접하는것보단 직접 발로 뛰면서 체득하는 것임은 알고있다. 그게 더 공부가 되겠지. 수습기자니까. 하지만 이런 현장을 접할 때마다 편치 않은 마음에 무게만 더해간다. 


"누나 또 평택까지 운전하고 갈거야?"

"그럼, 별 수 있어?"

"그냥 인계동 여관에서 자고 출근하자. 방값은 내가 낼께."

"꺼져."


애써 기분을 바꿔보려 농담을 주고받지만, 마지막으로 들은 주민들의 말이 정기자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뭐야, 이 와중에 기껏 생각한다는게 집값이야? 서민아파트랑 비교하면 그게 위안이 되는건가. 

결국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우리 하늘같으신 선배님들도 뭔가를 잡수셨겠지. 괜찮아 이따위 것, 이미 익숙하니까. 못보던 광고가 하나 더 실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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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무협/단편] 유소협, 비급을 얻다.


이태전, 중원은 피바람에 휩싸였다. 무림맹이 천하를 평정한 지 10년 째 되던 해,

암약하던 사파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짧았던 태평성대는 종식을 고했다.

 

중독된 이들로 하여금 돈에 대한 염(念)을 걸어, 매일 지전(지폐)을 씹어 삼키지 않으면

 '경제성장(經濟成長), 땅갑상승(當甲上昇)'이라는 여덟자의 저주를 내뱉고

아홉개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저주. 이른바 '돈독(焞毒)'을 앞세운 사파의 위력에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이름높은 명문가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파죽지세로 중원을 향해 세력을 넓혀 오는 사파의 중심 세력, 감나라대추나라당

(疳那裸代醜那裸黨)의 젊은 당주 임연박(姙挻迫)은 왜(倭)나라 출신으로,

성품이 교활하고 손속이 잔인한 인물이었다. 한양성이 함락되던 해에

광화문(光化門)과 청계천(淸溪川) 일대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변했고,

임당주의 생일에는 숭례문(崇禮門)을 불태우며 비파를 뜯고 시를 읊었다 전해진다.

 

이때, 멸절된줄로만 알았던 정파에서도 각지의 젊은 영웅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 내륙지방의 대구현(大丘縣)이라는 작은 분지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여보게, 공자, 내 잠시 길 좀 물음세."

 

자신을 부르는듯 한 카랑카랑한 사내의 목소리에 소년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급히 뛰어온 듯, 가쁜 숨을 고르는 사내의 모습은 어쩐지 부엉이를 닮아 있었다.

사내를 돌아보는 소년은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나 비범한 눈빛을 하고 있다.

 

"혹시 이 근처에 무림맹의 지구당(地區黨)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알고는 있습니다만, 무림맹은 이미 쇠락하여 그곳엔 아무도 없을 터인데...."

 

사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엷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공자, 나는 봉화산에 찾아가는 길인데,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

한참을 헤맸다네. 노자도 떨어지고, 그저 빈 집이 있으면 하룻밤 묵어갈까 해서 그런다네."

 

사내의 말에, 소년은 옷깃을 바루며 포권을 하고 공손하게 답했다.

 

"하오시면, 후배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 가시지요. 비록 누추하나, 객 한분 모실 방은 있습니다."

 

"정말 그리 해도 되겠는가? 이거 참, 정말 고맙게 되었네."

 

 

두 사내는 거리를 걸으며, 서로를 소개하고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년의 성은 유(柳)가라 했다. 한편 부엉이를 닮은 사내는

충남도 청양현 출신으로, 얼마 전 서거하신 무림맹의 2대 맹주 노공의 조문을 위해

봉화산을 찾아가는 길이며, 성은 이(李)가요, 자는 쿨벙(堀鳳)이라 했다.

 

"헌데, 봉화산에 가려면 남쪽으로 가셔야 할 터인데, 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러게 말일세. 도중에 객잔에서 감나라대추나라당의 대마두 술성영(戌-개 술, 性迎)을 발견하고

놈의 뒤를 쫓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결국 놓치고 말았다네."

 

"술성영이라, 그 자의 첩이 사는 곳을 후배가 알고 있습니다.

'밤문화'라고 하는 기방이온데, 후배의 집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정말인가? 마침 잘 되었군. 내 그놈을 잡아 반드시 요절을 내고 말겠네."

 

 

두 사내가 의기투합하여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발길은 어느새 유소협의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러자, 이웃집에 사는 식태존(食太尊)이라는 소녀가 뛰어나오며 유소협에게 매달렸다.

아마 대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작은나으리, 큰일 났습니다요. 한 아가씨가....."

 

"뭐라? 한소저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이웃집식태존의 설명에 따르면, 술성영의 직속 사병 부대인 지랄병(指剌兵)이 저자거리에서 

아녀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면서 "옥수수수염주에 넣을 머리카락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다.

이를 보다 못한 한가장 장주의 여식 한소저가 월녀검법(月女劒法)을 펼쳐 싸우다 그만

술호영의 암수에 당해 생포되고 만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유소협은 분노에 주먹을 쥐었다.

 

"이런 갈아만든 십팔색깔 계좌수표 같은놈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사내에게 이웃집식태존이 사정을 설명했다. 잡혀간 한소저는 유소협의 정혼자로,

평소 머리 숱이 적고 가늘어서, 소중한 모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다.

 

"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피리 계좌이체 같은 도적놈! 무림맹 초대 맹주를

능멸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죄 없는 아녀자들의 모발까지 노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선배, 술성영을 처단하겠다 하셨지요? 오늘밤, 후배도 돕겠습니다."

 

"하지마는... 후배님은 무공을 모르는 서생(書生)이 아니신가?

내가 혼자 가서 술성영의 목을 베고, 후배님의 정혼녀를 구출해 올 터이니 여기서 기다리게."

 

"아닙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화염병을 들고 녹각성(鹿角城:현대의 바리케이트와 같은

책(柵)의 일종)으로 돌진하는 심정으로, 함께 가겠습니다."

 

"정히 결심이 그러하다면... 좋네. 하지만 내 보기에 후배님은 수련이 필요할듯 하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후배, 소시적 내공수련과 경공법의 기초 지도는 받은 바 있습니다."

 

"어쩐지, 근골의 기본이 잘 잡혀 있다 싶었네. 마침 내가 오래전에 실전된 줄 알았던 비급을

구했는데, 후배에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유소협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비록 그동안 글공부만 하여 무공을 모르는 서생이나, 천하가 도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는데

어찌 글만 쓰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림맹의 초대 맹주님과 이대 맹주님께서 서거하신 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시름에 빠졌던가! 오늘 이대협이라는 든든한 협객 동지가 생겼고,

때마침 원수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인지도 모른다.

곧고 선한 성품과 연약한 머릿결을 가진 한소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도탄에 빠진 억만창생과 종묘사직을 위해, 

감나라배추나라당의 후안무치한 무리들을 처단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괴나리봇짐에서 낡은 책을 꺼내 든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낮빛을 내비쳤다.

 

"그런데 이거... 솔직히 말해서 별로 권하고 싶지 않네."

 

"어째서입니까? 후배가 배우기엔 벅찬 상승의 무공입니까?"

 

"아닐세. 이 비급에 적힌 내용대로 두 시진만 수련한다면, 후배가 혼자서도 능히 술성영과 그 무리들을

상대할 수 있을걸세. 하지만, 많은 것을...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게야."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다급해진 마음에 유소협은 사내의 손에서 비급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본 표지에는.....

 

"이...이것은..."

 

 

 

 

 ".........규화보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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