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보관함 2009. 9. 12. 12:05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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