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태채무자입니다. - DJ선생님 영결식날 아침에.

독백_일기,잡담 2009. 9. 5. 20:45




서거하신 다음날, 분향소 가던 길.

김대중대통령님께서 노무현대통령님의 분향소를 찾으셨던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다운받아 아이팟에 넣고, 반복해서 들으며 거리를 걸었습니다.


한동안 개그맨들이 따라하는 등 유행이 되기도 했던 그분의 조금은 어눌한 말투,

아니 그때보다 많이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분향소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앉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봤습니다.


그냥 멍-하니 있었습니다.


많지는 않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분향소 주변에는 삼삼오오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는 

민주당 당원들이 보입니다.

(개중에는 아는 얼굴들이 있어, 그간 격조하셨다고 인사를 나눕니다.)





저는 81년 2월생입니다.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사랑하던 분들이 죽어갈때


내 부모는 연애를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는 부산 태생으로 포항에서 자랐습니다.

지금 부산시청, 부산역 분향소 상황들을 보시듯,

그곳 어른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은 북한=전라도=김대중=빨갱이 였습니다.

나중에 커서 서울이든 어디든 가서도 전라도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

저는 어릴적부터 이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선거때 동네 벽에 나붙었던 선거 포스터를 기억합니다.

유독 당신의 사진만이 험하게 뜯겨져 있었고

빨갱이, 전라도놈이라는 낙서가 있었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열 두 살 무렵의 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 입으로 '김대중이는 빨갱이라 카더라'라 내뱉었던 일을,

그리고 어른들에게 '니 똑똑타' 칭찬을 들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후에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경상도 촌구석에서 자라면서 들어 왔던 것과는 달리, 

전라도 사람들은 빨갛지도, 머리에 뿔이 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의 일독을 권하더군요.

그것이, 당신의 진면목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97년, 제게는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아주 평범한 경상도 사람이었던 부모님은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정말로 큰일이 나는줄 아셨습니다. 

김대주이 찍으라니까. 김대주이 빨갱이 아이라니까.

설득은 실패했고, 내 가족친지들은 색안경을 끼고 

나를 '예수천당불신지옥'에 버금가는 광신도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97년 선거에서 당신은 승리했고, 

헌정사상 최초의 민주정부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그날은 너무 기뻐서, 괴성을 지르며 동네 골목을 뛰어다녔습니다.

미친새끼, 우리 집에서 빨갱이새끼가 나왔구나 하는 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면서도 마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저 행복했습니다.

입술 위에 점이 있던 여학생에게 사귀자는 말을 들었을때보다

더 설레고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늘로 날아오를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이 TV에 나와서, 이런저런 약속을 하시던 말씀....

내용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얼굴만 봐도 좋았습니다.



당신께서 퇴임하신 후,

신촌에 사는 친구녀석 집에 놀러갈 때면,

밤마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사저를 한 바퀴 돌며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대문 앞에서 큰 절을 올렸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성지 순례'라 불렀었습니다.

성지를 찾을때마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항상 불이 켜 있었고,


'이 늦은시간까지 또 무슨 공부를 하시는걸까'


'아냐 뭔가를 집필하시는걸꺼야'


채 백보도 되지 않는 곳에 내 영웅이 계시다는 사실에

마냥 설레하는 소년들처럼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몇 해 전 5월, 망월묘역 참배하러 광주에 갔던 날에는

김대중컨벤션센터 공중화장실에서

'행동하는 양심은 아름답습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마치 10년 전의 첫사랑이라도 만난 듯 두근거렸습니다.





20대 초반의 저는 삐딱하다 못해 악에 받쳐 있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서울말을 쓰고,

어디서 경상도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연쇄살인범이라도 만난 듯 경계했습니다.


그러다 이따금씩, 경상도 사람이 내 고향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강간 현행범을 한나라당이라는 이유로 시장으로 뽑아주는 양심도 낯짝도 없는 부산놈이요.



몇 해가 지나고, 20대 중반의 저는 

경상도에 대한 저주를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어릴때부터 보아왔던 그 멍청한 경상도 사람들,

그 경상도 촌구석에 살면서 평생 몇번이나, 

아니 실제로 전라도사람을 만나본적이 있기나 한건지?

불쌍한 생물들... 그저 입만 열면 정치인 욕만 했지, 

이렇게 나라 망쳐놓은게 자기 자신들이란건 무덤에 들어가서도 깨닫지 못할테지.




김대중 선생님을 평가할때,

'구시대적 정치구조를 극복하지 못한, 권위적 계파정치의 수장'이라는 표현을

저는 굳이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던걸까요?


민주주의를 말하면 잡혀가고 죽어가던 시절,

당신의 곁을 지켰던 '동지들'은 그들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같은 설움을 가진, 의리로 뭉친 이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대신에, 당신께서 미처 못 이룬 부분을 우리에게 넘겨주시기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의 적극적 정치참여는

김대중 선생님께서 다져주신 인터넷을 기반으로 시작되었고,

또 김대중 선생님께서 일궈주신 민주정권의 햇살 아래 자라났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행동하는 양심"이야말로

두 분 대통령께서 남겨주신 가장 값진 유산일겁니다.




저는 모태자유 세대가 아니라, 모태채무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신께 빚을 졌습니다.


조금이나마 갚아볼 겨를도 없이,

저는 종신토록 당신의 채권에 묶인 삶입니다.


당신께서 남겨주신 유산 위에서,

당신께서 끝내 이루지 못했던 부분을 이어받아

당신의 자식들과 함께 이뤄 나가겠습니다.



내 모든 활동의 시작이기도 했던,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평생의 화두, 지역주의 타파.

부산의 파도야! 광주의 무등산아! 너희에게 넋이 있다면 이 김대중이의 자식들을 버리지 말아다오!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전에서도 콩이다!


보스나 스타정치인에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보다는

깨어있는 시민 개개인의 스스로의 판단이 이끌어가는 사회와 정당.

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범국민적 의식개혁에 동참하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행동하겠습니다.

퇴색되지 않는 당신의 뜻을 내 가슴에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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