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무협/단편] 유소협, 비급을 얻다.


이태전, 중원은 피바람에 휩싸였다. 무림맹이 천하를 평정한 지 10년 째 되던 해,

암약하던 사파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짧았던 태평성대는 종식을 고했다.

 

중독된 이들로 하여금 돈에 대한 염(念)을 걸어, 매일 지전(지폐)을 씹어 삼키지 않으면

 '경제성장(經濟成長), 땅갑상승(當甲上昇)'이라는 여덟자의 저주를 내뱉고

아홉개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저주. 이른바 '돈독(焞毒)'을 앞세운 사파의 위력에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이름높은 명문가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파죽지세로 중원을 향해 세력을 넓혀 오는 사파의 중심 세력, 감나라대추나라당

(疳那裸代醜那裸黨)의 젊은 당주 임연박(姙挻迫)은 왜(倭)나라 출신으로,

성품이 교활하고 손속이 잔인한 인물이었다. 한양성이 함락되던 해에

광화문(光化門)과 청계천(淸溪川) 일대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변했고,

임당주의 생일에는 숭례문(崇禮門)을 불태우며 비파를 뜯고 시를 읊었다 전해진다.

 

이때, 멸절된줄로만 알았던 정파에서도 각지의 젊은 영웅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 내륙지방의 대구현(大丘縣)이라는 작은 분지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여보게, 공자, 내 잠시 길 좀 물음세."

 

자신을 부르는듯 한 카랑카랑한 사내의 목소리에 소년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급히 뛰어온 듯, 가쁜 숨을 고르는 사내의 모습은 어쩐지 부엉이를 닮아 있었다.

사내를 돌아보는 소년은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나 비범한 눈빛을 하고 있다.

 

"혹시 이 근처에 무림맹의 지구당(地區黨)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알고는 있습니다만, 무림맹은 이미 쇠락하여 그곳엔 아무도 없을 터인데...."

 

사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엷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공자, 나는 봉화산에 찾아가는 길인데,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

한참을 헤맸다네. 노자도 떨어지고, 그저 빈 집이 있으면 하룻밤 묵어갈까 해서 그런다네."

 

사내의 말에, 소년은 옷깃을 바루며 포권을 하고 공손하게 답했다.

 

"하오시면, 후배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 가시지요. 비록 누추하나, 객 한분 모실 방은 있습니다."

 

"정말 그리 해도 되겠는가? 이거 참, 정말 고맙게 되었네."

 

 

두 사내는 거리를 걸으며, 서로를 소개하고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년의 성은 유(柳)가라 했다. 한편 부엉이를 닮은 사내는

충남도 청양현 출신으로, 얼마 전 서거하신 무림맹의 2대 맹주 노공의 조문을 위해

봉화산을 찾아가는 길이며, 성은 이(李)가요, 자는 쿨벙(堀鳳)이라 했다.

 

"헌데, 봉화산에 가려면 남쪽으로 가셔야 할 터인데, 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러게 말일세. 도중에 객잔에서 감나라대추나라당의 대마두 술성영(戌-개 술, 性迎)을 발견하고

놈의 뒤를 쫓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결국 놓치고 말았다네."

 

"술성영이라, 그 자의 첩이 사는 곳을 후배가 알고 있습니다.

'밤문화'라고 하는 기방이온데, 후배의 집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정말인가? 마침 잘 되었군. 내 그놈을 잡아 반드시 요절을 내고 말겠네."

 

 

두 사내가 의기투합하여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발길은 어느새 유소협의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러자, 이웃집에 사는 식태존(食太尊)이라는 소녀가 뛰어나오며 유소협에게 매달렸다.

아마 대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작은나으리, 큰일 났습니다요. 한 아가씨가....."

 

"뭐라? 한소저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이웃집식태존의 설명에 따르면, 술성영의 직속 사병 부대인 지랄병(指剌兵)이 저자거리에서 

아녀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면서 "옥수수수염주에 넣을 머리카락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다.

이를 보다 못한 한가장 장주의 여식 한소저가 월녀검법(月女劒法)을 펼쳐 싸우다 그만

술호영의 암수에 당해 생포되고 만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유소협은 분노에 주먹을 쥐었다.

 

"이런 갈아만든 십팔색깔 계좌수표 같은놈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사내에게 이웃집식태존이 사정을 설명했다. 잡혀간 한소저는 유소협의 정혼자로,

평소 머리 숱이 적고 가늘어서, 소중한 모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다.

 

"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피리 계좌이체 같은 도적놈! 무림맹 초대 맹주를

능멸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죄 없는 아녀자들의 모발까지 노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이선배, 술성영을 처단하겠다 하셨지요? 오늘밤, 후배도 돕겠습니다."

 

"하지마는... 후배님은 무공을 모르는 서생(書生)이 아니신가?

내가 혼자 가서 술성영의 목을 베고, 후배님의 정혼녀를 구출해 올 터이니 여기서 기다리게."

 

"아닙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화염병을 들고 녹각성(鹿角城:현대의 바리케이트와 같은

책(柵)의 일종)으로 돌진하는 심정으로, 함께 가겠습니다."

 

"정히 결심이 그러하다면... 좋네. 하지만 내 보기에 후배님은 수련이 필요할듯 하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후배, 소시적 내공수련과 경공법의 기초 지도는 받은 바 있습니다."

 

"어쩐지, 근골의 기본이 잘 잡혀 있다 싶었네. 마침 내가 오래전에 실전된 줄 알았던 비급을

구했는데, 후배에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유소협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비록 그동안 글공부만 하여 무공을 모르는 서생이나, 천하가 도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는데

어찌 글만 쓰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림맹의 초대 맹주님과 이대 맹주님께서 서거하신 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시름에 빠졌던가! 오늘 이대협이라는 든든한 협객 동지가 생겼고,

때마침 원수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인지도 모른다.

곧고 선한 성품과 연약한 머릿결을 가진 한소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도탄에 빠진 억만창생과 종묘사직을 위해, 

감나라배추나라당의 후안무치한 무리들을 처단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괴나리봇짐에서 낡은 책을 꺼내 든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낮빛을 내비쳤다.

 

"그런데 이거... 솔직히 말해서 별로 권하고 싶지 않네."

 

"어째서입니까? 후배가 배우기엔 벅찬 상승의 무공입니까?"

 

"아닐세. 이 비급에 적힌 내용대로 두 시진만 수련한다면, 후배가 혼자서도 능히 술성영과 그 무리들을

상대할 수 있을걸세. 하지만, 많은 것을...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게야."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다급해진 마음에 유소협은 사내의 손에서 비급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본 표지에는.....

 

"이...이것은..."

 

 

 

 

 ".........규화보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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